
독립 영화 <파수꾼>에 대한 작은 입소문이 돌았다. 평론가들은 탁월한 신인감독의 탄생이라는 수식어로 파수꾼이라는 영화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똥파리><워낭소리>로 시작해 성공작이라고 불릴만한 독립 영화들 속에 <파수꾼>도 포함되려는 분위기다. 물론 그 저변에는 뜨지 못 한 수많은 독립영화들이 깔려 있겠지만 말이다.
<파수꾼>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십대들의 갈등 역시 매우 흔한 주제다. 파수꾼이 특별하게 취급받는 것은 그런 흔한 주제를 펼쳐나가는 방식의 특이성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방식, 즉 현재의 어떤 지점에서 과거로 연결시켜 내러티브를 펼쳐나가는 방식 역시 아주 독창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원인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미스터리 흉내를 내고 있지만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이른바 주인공의 자살에 대한 동기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동기는 사실 주변에 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소해보이기까지 한 이유를 밝혀내는 방식은 매력적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 조연들, 배경인물들은 모두 십대들이다. 이 영화에서 존재성이 있는 어른은 기태 아버지 한 명밖에 없다. 다른 어른들은 얼굴조차 제대로 비춰지지 않는다. 기태 아버지는 아들의 자살 원인을 밝히기 위해 문제를 제기하고 역추적을 시작한 시발점 역할을 하지만 그 역시 방관자에 불과하다. 그는 일의 진행에 있어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어른들은 이 영화에서 시작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어떤 보조적인 역할조차 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방관자의 위치를 지킨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이 세 아이들의 관계는 철저하게 그들만의 관계라는 점을 묘사하고 있으며 책임성의 소재 역시 따지기가 쉬워지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태의 죽음이라는 결과의 원인을 누구에게 따져야 할지가 모호해지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사건의 시발점을 찾아서 역으로 거슬러올라감에도 불구하고 올라갈 수록 명료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정말 그것뿐이었을까라는 의문점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과와 원인의 비중이 맞지 않은 데서 발생하는 문제로 보인다.
기태의 본심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선 결국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겨둔 채 영화는 갑작스럽게, 혹은 김새게 끝나버린다.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명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사소해보이지만 그 나이의 한 청소년에겐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만큼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사소한 문제를 파헤쳐가는 그 방식의 노련함과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허탈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삶이 그렇게 허탈한 것이라는 의미를 깔고 있는 것이었을까. 결국 스타일 면에서 이 영화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과거와 현재는 늘 함께 다닌다는 사실을 영상 미학으로 재해석해냈다는 정도다.
여러 감정들이 납작하게 응축돼 있는 듯한 기태의 표정 연기가 프레임을 가득 채운 것 이외에 깊은 인상을 남길만한 장면을 기억할 수 없는 탓에 이 영화는 한번만 보고서는 표면 밑으로 들어가 있을 섬세한 층들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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