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어른 세상에서 아이로 머물기 영화, 드라마 이야기

영화의 배경은 플로리다 올랜도에 있는 디즈니월드 건너편의 모텔이다. 관광객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일 숙박료를 지불하며 일주일 단위로 머무는 홈리스들이다. 

  장기 숙박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일주일 단위로 입실과 퇴실을 번복하며 살아간다. 포스터에 그려진 보라색 건물과 그 위에 뜬 무지개, 그 밑에서 발랄하게 뛰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크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포스터에 쓰여진 문구는 더 심하다. '2018년 우리를 행복하게 할 가장 사랑스러운 걸작' '디즈니 월드보다 신나는 무지개 어드벤처'라는 문구는 사기다. 이 영화는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안에는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빈곤에서 벗어나기 힘든 사회 구조 속에서 발버둥치는 어른들이 있고 그 안에서도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이 영화에는 아이들만 등장하지 않는다. 어른의 모습을 한 아이도 등장한다. 똑같은 형태로 어른의 말투를 쓰는 아이도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무니가 그런 아이다. 무니의 말투는 엄마의 말투와 똑같다. 무니의 엄마, 핼리와 무니의 정신연령은 똑같다. 열악한 환경에서 두 사람은 거의 쌍둥이가 됐다. 큰 어른과 작은 어른이, 아니면 큰 어린아이와 작은 어린아이가 서로 의지하면 살아가는 형태다.


  무니가 어린아이만이 가능한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며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 핼리는 직면해야할 현실을 무시함으로써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숨는다. 성인에게 상상의 세계는 더 이상 힘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핼리는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상대방에게 모욕주기와 거짓말로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 폭력도 불사한다. 세상을 향한 분노가 자신을 지키는 무기다. 무니가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기인 상상으로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면, 핼리를 지탱시키는 힘은 바로 그런 데 있다. 


  무니의 세계는 다른 두 친구들이 공유한다. 하지만 핼리의 세계에는 공유자가 없다. 그래서 더 외롭고 불안정한 사람은 핼리다. 유일한 친구였던 애슐리도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애슐리 역시 식당 종업원으로 여유없이 살아가고 훌륭한 엄마는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최소한 용납되지 않는 선이 있다. 핼리는 그 선까지 위반한 사람이다.  애슐리가 볼 때, 핼리는 어른으로서, 또한 부모로서 최소한의 책임감과 도덕의식이 없다. 


  핼리 곁에는 무니뿐이다. 아동국에서 무니를 데리러온다는 것은 핼리에게는 단순히 아이를 뺏긴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녀 세계의 유일한 공유자를 뺏어가는 일이며 그녀에게는 완전한 소외를 뜻한다. 아동국으로 간다는 것은 무니에게도 고립을 뜻한다. 무니에게 절망적인 것은 엄마와 이별보다는 단짝친구와의 기약없는 헤어짐이며 무니가 구축해온 세계의 무너짐이다. 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무니가 유일하게 아이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어른들을 조롱하고 어떻게 해야 엄마가 물건을 팔 수 있는지 잘 알고 협력하던 무니는 그제서야 두려움을 아는 어린 아이로 되돌아간다. 무니의 단짝 친구, 젠시는 무니의 눈물에서 절망을 본다. 젠시는 무니의 절망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두 아이가 손을 잡고 뛰어가는 엔딩 시퀀스는 당황스러운 만큼 여러 감정을 교차시킨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에 디즈니월드의 성이 보인다. 그곳이야 말로 진짜 마법의 성, 즉 매직 캐슬처럼 보인다. 매직 캐슬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모텔인 가짜 성이 아닌 진짜 매직 캐슬로 그들은 달려간다. 수많은 어른들과 차량 사이를 헤치면서 작은 아이들을 달려간다. 

   그들은 곧 그곳 역시 진짜 마법의 성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앞에 놓인 디즈니월드의 성은 매직캐슬 모텔 위로 솟아있던 무지개만큼 현실과 동떨어져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달려가고 있다. 달려가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무니는 친구들과 놀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이 쓰러진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쓰러진 상태에서도 계속 자라기 때문이야."라고.

  

   달려가는 한 그들은 계속 자랄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어른들 역시 모두 아픈 사람들이다. 가장 현명하게 보이는 매직 캐슬의 매니저, 바비(웰렘 데포 분) 역시 어머니와 관계에서 엄청난 상처를 간직하고 있음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영화에서 상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관광객이 아니면서 관광지의 모텔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안정된 미래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머무르다 가야할 장소에서 계속 머무르고 있다. 그들은 무니와 젠시처럼 마법의 성을 향해 달려갈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가짜일지라도 엔딩 시퀀스에서 보이는 희망의 메시지를 그들은 흉내조차 낼 수가 없을 것이다. 


매혹적인 갑질의 목소리...목소리...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

조현민의 두번째 녹음 파일이 공개됐다. 첫번째 녹음과는 달리 잡음 하나 없이 깨끗이 잡아낸 녹음이라 생생하다. 찢어지는 목소리로 일관된 첫번째 파일은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 첫번째 파일의 목소리는 그냥 떼쓰는 어린 아이의 울부짖음에 불과했다.


인상적인 것은 이 두번째 파일이었다.

이 파일을 들으면서 나는 내용보다는 조현민이 발음하는 방식에 매우 끌렸다.

이 파일의 목소리는 매우 낭랑한 편이다. 충격적인 것은 뭔가를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소음이나 반말, 욕지거리보다는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즐기는 듯한 독특한 발음의 방식과 억양에 있었다.


단어를 잘근잘근 씹어대며 짓이기듯한 발음이 매우 특이하고 중독성이 있어서 여러번 듣게 만든다.

'맞아요, 안 맞아요?'라고 할 때 이를 바득바득 가는 듯한 발음이다.

자세히 들어보면 '맞즈아요, 안 맞즈아요.' 비슷하다.

'이 따위로 갖고와?'라고 할 때 '따위'를 '뜨아이'라고 잔뜩 눌러 발음한다.

'징계해'라고 말할 때 '징'에 힘을 잔뜩 넣는다. 이응을 눌러 발음해서 '즈잉'으로 들린다.


조현민은 분에 못이기는 듯 입 근육에 잔뜩 힘을 주면서 힘들게 단어들을 분만해냈다. 진통 속에서 애가 나오는 듯이.

마치 배우가 분에 못 이기는 연기를 할 때 억지로 과장된 발음을 하듯이 부자연스럽게 과장돼있다.

똥을 누면서 아이 낳는 것처럼 지나치게 심각한 느낌이랄까.


"어딜, 어디서."라고 말할 때 특히 소름이 돋는다.

자세히 들어보면 "오어딜, 오어디서어어어"라고 들린다. '어어'할 때 억양이 덩실 춤을 춘다.

이건 상황을 즐기는 목소리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에 취해 있었다. 남들을 짓누르는 자신의 목소리에 중독돼 있었다.


나는 이 목소리들을 한번에 연이어서 듣고 싶었으나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기자의 설명 때문에 끊겨서 짜증스러웠다. 기자는 왜 자꾸 중간에 설명을 삽입하는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것들을.

사이코 스릴러 영화보다 흥미로운 이 대사들을 왜 방해하느냐말이다.


내가 그 앞에 있었다면 나는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을 것 같다.

이건 너무 어설픈 연기야. 너무 어설퍼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상황과 너무 어울리지 않게 과장돼 있어.

잔뜩 허영심만 들어간 연기자가 자기 연기에 취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기를 하는 것 같잖아.

수준도 맞추지 못한 자신의 작품을 보고 스스로 감탄하는 사람을 봤을 때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 같은 거 있잖아.

흐흐흐흑. 이런 생각으로 나는 이를 악물며 웃음을 참았을 것 같다.


뱃속이 간지러울 정도로 웃겨서 슬프다.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팬텀스레드> 영화, 드라마 이야기




  집근처 영화관에서 하루에 한 차례밖에  상영하지 않는 귀한 영화, <팬텀 스레드>를 드디어 보았다.  예쁜 옷들을 실컷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들고 입는 옷은 유령의 피부였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정체성을 영화는 이런 식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에 대해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다. 규정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인간들 사이에 그런 감정이 지속 가능한 것인지, 한 순간의 미몽에 불과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팬텀 스레드>는 사랑이라는 모호함을 이번에는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라질만하면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 것.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것이 정말로 사랑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서로가 사랑이라고 믿는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팬텀 스레드>에서는 어머니의 유령을 끌어안고 사는 병든 남자와 그 유령의 자리를 자신의 실체로 대신하고 싶은 집요한 욕망을 가진 여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의 욕망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오프닝 씬에서 알마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레이놀즈는 제꿈을 이뤄줬고 나는 그가 가장 열망하는 것을 주었지요."


  조그만한 변화에도 흩뜨러지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레이놀즈는 규칙적인 일상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지탱한다. 그 집에는 수많은 재단사들과 누나가 있다. 그들은 아침마다 규칙적인 일과로 시작한다. 그들의 세상은 앞으로도 전혀 변화가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레이놀즈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이 어떤 유행을 따르건 그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환상을 채워줄 여자의 자리만 있을 뿐, 그 자리에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해도 레이놀즈에게는 상관이 없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딴지를 거는 여자는 레이놀즈가 세워놓은 질서의 세상에서 튕겨져나가길 자처하는 사람일 뿐이다.

  누나도 자신도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가 생길 여지도 없다. 늘 반복되는 것은 안정된 것같은 착각을 준다. 그래서 그것을 안정감이라고 믿고 살고 싶어한다.


  레이놀즈에게 드레스는 허물어지기 쉬운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피부와도 같다. 레이놀즈는 자신이 만든 피부 속에 은밀한 글귀를 넣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죽은 엄마가 늘 자신 곁에 있다는 환상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 나간다.  엄마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환상으로 그에게 나타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엄마는 자신을 떠나야만 하거만 늘 자신 곁에 머문다. 웨딩드레스는 변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변화를 거부하는 그는 정작 자신은 웨딩드레스를 입기를 거부한다.

  또한 드레스는 여자들에게 또 다른 피부다. 멋진 피부는 여자에게 자신의 존재가 가치 있음을 확인해준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게 지켜준다.


  다른 여성들처럼 레이놀즈의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주장하던 알마 역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이 영화 속에서는 그 위기가 두 번 나온다. 다른 여자들처럼 드레스를 선물받고 짐을 싸는 대신 알마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 소량의 독버섯을 갈아넣어 레이놀즈에게 극도의 불안감과 죽음의 공포를 선사하는 방법이다. 첫번째는 레이놀즈가 알지 못하게, 두번째는 레이놀즈한테 보란 듯이 그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 첫번째는 레이놀즈가 선택하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두번째는 그에게 선택권을 준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좀더 강력한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들과의 차이라면 알마는 레이놀즈가 지니고 있는 불안감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신의 방법이 통할 것을 알고 있었다. 목숨을 앗아가지 않는 독은 선물이 되어 돌아올 것임을.

  설사 레이놀즈가 그로 인해 죽는다고 해도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옳은 선택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욕망은 레이놀즈이고 레이놀즈를 포기하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레이놀즈 역시 알마의 계략을 눈치채고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사랑 놀이는 기묘하게 마무리된다. 자신의 결핍을 메워주는 것이 사랑의 의미라면, 상대방의 결핍을 해석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결핍을 메워주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사랑의 의미라면, 그들의 계략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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