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영화, 드라마 이야기

처음에 나오는 사진 장면들부터... 느낌이 불안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알려주는 흔적들 같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사진들이었는지 확인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역시 흔한 러브스토리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다른 러브 스토리들과 결코 같지 않다. 그 느낌은 주인공인 조제의 말처럼 바다 밑에서 '조개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같은 이물감이다.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없는 엔딩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주인공들은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일반인의 정서로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이별. 닳고 닳은 러브스토리들 중에 이 영화가 특별한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츠네오는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 스타일이다. 특별히 상대방을 배려해 자신의 행동을 자제하는 법도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이 영화의 엔딩이 충격적인 것은 결국 그가 평범하다는 데 기인한다. 평범이라는 말은 주인공과 관객 사이에 벽을 없앤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가 된다.  

그래서 그렇게 충격적으로 평범한 대학생인 츠네오는 조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하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조제는 평범한 여대생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녀는 걷지 못 하는 장애인인 것이다. 더군다나 가족이라고는 없는 고아라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방에 갇힌 채, 할머니가 주워온 수많은 책들로만 세상을 만나왔던 조제의 마음 속엔 늘 세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욕망 중엔 물론 여자로서 남자를 사랑하고 싶은 욕망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제의 말처럼 츠네오를 만나기 전의 세상은 빛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는 심연이었다. 정지하듯, 흘러가듯 그렇게 천천히 가던 시간은 이제 너무 빨라서 카메라 속에도 제대로 담기지 않을만큼 숨가빠진다. 조제에겐 유모차에서 바라보던 것과는 사뭇 달라보이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등이 있고, 다정한 포옹이 있으며 둘만이 나누는 말없는 언어가 있으니까. 하지만 책이 주는 무한한 정신적 공간 속에서 내공을 키워왔던 조제는 결코 평범하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게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그 시간이 끝나버릴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조제는 불안한 마음으로 행복을 덮는 우는 범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작은 젖가슴을 지녔지만 조제는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었다. 가장 행복한 순간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순간들을, 자신에게 허락된 연인을 충분히 소유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소유했던 사람에게는 서툰 미련 같은 건 남지 않는다. 나중에 당한 아픔이 두려워 미리 포기하는 일도, 방어막을 철저하게 치는 일도 하지 않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니다. 벽장 속에서 불 하나로 버티면서 익숙해졌던 수많은 시간들이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타인에게서 사랑을 받지 않아도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여자였던 조제는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이따 저녁 때 만나자는 말을 하듯 쉽게 이별을 하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예전의 애인에게 돌아가는 츠네오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울음을 터뜨린다. 어리둥절한 관객은 그때야 비로소 그들이 이별했음을 깨닫는다. 옛 애인이 밥상을 차려주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츠네오는 갑자기 감정이 복받친다. 조제가 차려주던 밥상이 생각났을 것이다. 츠네오는 조제가 차려줬던 밥상을 받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라고 했다. 단촐하지만 맛있던 밥상은 조제라는 여자에게 끌리게 만드는 첫번째 동기였다. 조제와의 헤어짐은 옛 애인과의 재회처럼 결코 되풀이 될 수 없다. 완전한 끝인 것이다. 조제와의 사랑은 다른 여자친구들과의 교제와는 다르다. 조제와의 사랑은 그 시작이 쉽지 않았듯이 헤어짐도 결코 쉬울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시작했고 너무 담백하게 헤어진다. 이 영화 속에 숨어 있는 침묵과도 같은 슬픔은 그래서 가슴 속에 뭉친 채로 남아 있다. 할머니가 있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만남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죽음은 그들을 자유롭게 만든다. 기성세대의 벽이 없어졌다는 걸 뜻한다. 기성세대의 방어막이 없어도 그들은 자신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처리한다. 만남도 헤어짐도 그들 속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들의 만남엔 어떤 핑계거리도 있을 순 없다.    

조제에게 츠네오와의 이별이란 세상으로 향한 문이 닫히는 듯한 아픔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세상이 닫힌다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죽음...그렇지만 죽음 뒤에 있는 것은 암흑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다. 또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 하지만 조제는 다른 문을 또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츠네오가 없어도 조제는 식사를 준비한다. 자신만을 위한 식탁이지만 차분하게 생선을 구워낸다. 남의 등에 업히지 않아도, 남이 끌어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유모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 조제는 이제 전동 휠체어를 타고 스스로 세상밖으로 나선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은 이제 새로운 의미를 띄고 있는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이 수없이 반복되고 그 중엔 정말 기억에 떠오를까 무서울만큼 가슴 아픈 헤어짐도 있지만 헤어지는 순간 우린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자신만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는 삶이라고 해도 나는 어제의 나와는 또다른 나이다.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과의 만남, 그것 역시 새로운 만남이다. 

그래서 조제와 헤어진 츠네오는 가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조제를 떠올리고 눈시울을 붉히는 일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츠네오가 조제에게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고, 조제는 변함 없이 생선을 굽고 연근을 조리고 계란말이를 하면서 자신만의 식탁을 준비할 것이다. 그러니까 가장 행복한 순간 츠네오의 품안에서 조제가 예언하듯 했던 말처럼 가끔 아픈 추억을 떠올리며 사는 삶도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덧글

  • 별일없는 빙하 2012/11/03 16:13 # 답글

    고마워.. 당신의 글이 그나마 영화를 본다음의 머리끝이 핑도는 어지럼증과 슬며시 스미는 눈물을 가름하게해줬으니까

    이 영화한편이말하는것을 세밀히 짚어준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해,,,
  • agnes 2013/03/26 09:56 #

    아, 블로그 폐쇄할까 했는데 님 댓글 때문에 계속 하기로 했습니다...^^
  • 승현 2014/02/10 05:14 # 삭제 답글

    우연히 검색해서 보게 되었는데 감상 잘 읽었습니다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여러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영화예요 !
  • 인생백배즐기기 2014/08/09 15:09 # 삭제 답글

    영화를 본 후 검색해서 읽어봤습니다. 좋은 글이네요.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에서 혼자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 하지만 아직도 다이빙하며 떨어져 식탁으로 움직여야하는 현실.
    현실은 바뀌지 않고 그 현실을 바라보고 적응하며 달라진 조제의 모습(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쓸어올린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덕분에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jangkamdok 2014/08/23 18:34 # 삭제 답글

    "하지만 조제는 다른 문을 또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츠네오가 없어도 조제는 식사를 준비한다. 자신만을 위한 식탁이지만 차분하게 생선을 구워낸다. 남의 등에 업히지 않아도, 남이 끌어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유모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 조제는 이제 전동 휠체어를 타고 스스로 세상밖으로 나선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은 이제 새로운 의미를 띄고 있는 것이다....가끔 아픈 추억을 떠올리며 사는 삶도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 , 감사합니다.
  • aden 2015/02/15 19:40 # 삭제 답글

    이영화를 제목은 계속 들어왔는데.. 제목만 보고 김기덕 감독류의 영화인줄알고 안보고있다가..( 싫어하는건 아닌데 너무 우울해서.. ) 어제서야 봤습니다...참 이걸 왜 이제야 봤는지.. 좀더 어렸을때 봤었다면 좋았을텐데요.. 암튼 감상문이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 고마워요 2015/04/07 21:17 # 삭제 답글

    리뷰보고 더 울컥했네요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것이겠죠
    아직은 저도 이별이 아프지만 또 식탁을 차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죽음뒤에 또다른삶 아프도록 올곧기에 현실은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2015/05/05 22:43 # 삭제 답글

    영화를 뒤늦게 봤어요. 영화를 다 보고 나니 10년도 더 지난 옛 일이 떠오릅니다. 츠네오와 거의 같은 경험이 있어요. 아마 츠네오는 밥상 이야기를 듣고 감정이 북받친게 아니었을거에요. 그냥 상대방은 이야기를 하지만, 다리를 건너서 인도를 걸으며 그 걸음 하나 하나에 이별이 가슴을 누르는걸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나간 20대 후반의 기억이 가슴을 무겁게 하네요. 츠네오는 아마 조제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다 그런거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인생 2015/05/24 17:03 # 삭제 답글

    나에게도 죠제 같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씩씩하게 잘살아가는 중이겠죠?

    부디 ㅎ
  • 사랑따윈 2016/02/18 04:00 # 삭제 답글

    문득 이 영화가 다시보고 싶어져서 ..영화평 이라도 볼까 하고 찾아봤어요. 아마도 그건 글 주인님 말처럼, 가슴속에 무언가 찝찝한 , 조개껍질 같은 느낌이 걸리적 거리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찾고 싶어서 인지..모르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니는 조제 같은 여자에요. 사랑을 했고.. 하고 있고..
    그래서 더 영화가 와닿아요. 어떤 부분에선 나랑 참 똑같아 가슴
    밑바닥에서 뜨끔하게 아파오는게 느껴져요..
    해피엔딩이란 없는 걸까요?
    그래도 사랑을 해야만 하겠죠?
    내가 그의 가슴에 따끔한 흔적을 남겨 놓을 수 있다는게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든 사랑은 그렇게 잊혀지니까요..

    그래도 난 조제가 아니에요.
    사랑하는 부모님도 형제도 존경하는 선생님도 친구들도..
    있으니까요..
    지금 내게 있는 사람들에, 사랑에, 감사하며..
    흘러가야죠..
  • 해피엔딩 2016/05/29 11:35 # 삭제 답글

    오래전에 봤었는데 다시 보니 새롭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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