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새 나는 엄마가 뿔났다라는 드라마를 본다. 이 드라마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장미희가 연기하는 고은아 캐릭터 때문이다.
고은아 캐릭터는 현대판 귀족을 풍자하고 있다.
미모와 교양, 부...현대판 귀부인이 갖춰야 할 외양적인 조건은 일단 충족하고 있다. 본인은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고 그 성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건만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속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녀가 속물로 오인받는 이유는 가식적으로 보느껴지는 말투와 틈만 있으면 자신의 잡다한 지식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버릇 때문이다. 그리고 여왕처럼 숭배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끊임 없는 갈망 때문이다.
그녀에겐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만 존재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밖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경멸한다기 보다는 함께 섞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했을 때, 최대한의 우아함과 고상함을 내보이며 자신과 남을 구분짓는 경계선을 분명히 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경의심을 표하는 사람들에겐 갑자기 관대해진다.
며느리가 '전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처럼 될 순 없을 거예요'라고 하자, 갑자기 명랑해져 보는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만든다. 남편의 사랑은 그녀가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러므로 자존심과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그녀에게 아킬레스 건은 남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남편은 귀여운 속물을 사랑하는 것 같다. 고은아의 남편은 이 드라마의 작가 김수현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이상형인 것 같다. 김수현의 드라마엔 그런 이상형의 남성상이 꼭 있다. 김수현이 원하는 남성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만 하다. 한 여자를 끝까지 지켜주는 남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특별히 그 여자에게만은 너그럽게 눈감아줄 수 있는 남자다.
가끔 푼수처럼 보이는 이 여자는 경멸을 받을만한 속물인가.
속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속물의 속성을 털끝만큼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없다. 속세에 산다는 것 자체가 속물과 전연 무관할 순 없다.
자신에게 이로운 말만 듣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자신을 좋아하고 칭찬하는 사람들만 만난다면 머리 아플 일도 열받을 일도 없을 것 같다. 싫은 사람과 만나지 않는 것,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선 세상의 실세를 쫓을 수밖에 없고 그건 바로 속물화되는 거다.
고은아 캐릭터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착각 속에서 사는 이 여자가 마냥 밉살스럽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속마음을 감출 줄 모른다.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할 말 다 하고, 남편에겐 늘 보호받고 싶어하는 예쁜 인형처럼 보이길 자처하는 이 여자를 보면 그냥 철없는 아이를 볼 때처럼 웃음이 나올 뿐이다.
할머니가 되는 건 정말 싫다면서 며느리에게 출산을 미루기를 종용하고, 늙지 않는 약이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서 먹고 싶다고 말하는 이 여자, 여자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는 여자라면 누구라도 마음 속으로 한번쯤은 품어봤을 감정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나이값 못한다는 말도 두렵지 않은 듯 쉽사리 입 밖으로 뱉어낸다.
친구나 지인, 그리고 내 자신의 말투, 행동 속에서도 난 속물의 속성을 느낀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급작스럽게 싫어지진 않는다. 어느 정도 선까진 귀엽게 봐줄 수 있다.
그래서 귀여운 속물처럼 보이는 이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 역시 속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은아가 곱지 않은 눈총을 받을 이유가 있다면 자신의 노력 없이 저절로 얻어진 것들을 너무 정당화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노르레스 오블리제 운운하면서 자신을 방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남아도는 걸 내놓고 생색내는 게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절대로 기꺼이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다.
장미희가 연기하는 고은아 캐릭터를 보면서 가끔 대리만족을 느낄 순 있지만 그 여자처럼 되는 건 원치 않는다. 세월이 지났는데도 늙지 않는 채로 남는다는 건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외양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젊음이란 한 때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생명이 소중한 건 일회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생생한 느낌은 오히려 늙어가면서 더 실감하게 된다. 모든 건 분명히 사라진다는 걸 배우기 때문이다. 모든 건 상대적인 게 있어야 그 존재를 깨닫게 된다.
화려하게 꾸며진 귀족의 정원을 보면서 감탄이 나오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런 정원을 보면서 가슴 어딘가가 짠해지는 감동을 받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헝클어진 수풀 속에서 용케 맺힌 장미 꽃봉오리 속에 빼곰히 비춰지는 고운 빨간 꽃잎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그 때의 감동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어떤 게 귀한 것인지, 돈보다도, 젊음보다도, 아름다움 보다도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걸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된다.
그걸 모른다면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 나오는 불행한 두 여자, 골디혼과 메릴 스트립처럼 살게 된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는 탐욕을 부린 대가를 치루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