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뜨린느 브레야의 미스트리스와 팻걸 영화, 드라마 이야기



죽음과 맞닿은 사랑

까뜨린느 브레야 감독의 미스트리스를 본 지 한참 지났다. 팻걸의 종결부분만큼 충격적인 장면은 없었지만 여주인공인 벨리니의 자기 파괴적인 눈빛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두려움을 모르는 반항적이고 장난기 어린 눈빛은 이상하게 매력적이다.

까뜨린느 브레야 감독에게 남녀간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녀가 표현하는 사랑의 빛깔은 결코 밝지 않다. 사랑스러움과 행복, 설레임의 느낌을 주는 사랑이 아니다. 죽음 같은 사랑이다. 사랑을 나눈 대가로 결국 죽음에 이르거나, 사랑의 과정이 죽음의 색깔으로 변해간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죽음과 동일한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죽음도 두렵지 않는 사랑을 그린 영화들은 많다. 그리고 그런 영화에 감동 받는 관객도 많다. 그런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겠지만 그런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까뜨린느 브레야는 사람들의 그런 순진한 선망에 얼음장 같은 물을 끼얹는다. 마치 그런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팻걸에서 거추장스런 순결을 버리지 못 해 안달하는 아름다운 십대로 나왔던 록산느 메스키다가 이번엔 바람둥이 마리니의 아내로 나온다. 팻걸에서 록산느는 처녀의 탈을 벗자마자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당한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다. 뚱뚱한 몸 때문에 늘 열등감에 시달리며 아름다운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 했던 동생, 아나이스만 살아남게 되고 범인에게 강간을 당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그 다음날 경찰에게 인도되는 아나이스의 얼굴은 특이할 정도로 무표정이다. 끔찍한 사건을 겪는 사람의 얼굴치곤 너무 무심하다. 더군다나 그녀는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강간당하지 않았다는 말을 강조한다.  하지만 화면 상으로 볼 때 그녀는 강간을 당했다. 그렇다면  아나이스는 왜 자신의 순결성을 주장하는 것일까. 그 공허한 마지막 대사를 남기고 영화는 장난처럼 끝이 난다.

아나이스는 언니나 어머니만큼 아름답지 않다. 뚱뚱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적으로 별로 매력적이지 않는 자신의 육체에 정신적인 의미를 부가한다. 언니만큼 아름답지 않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열등감을 보상해줄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 즉 정신적인 정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성과의 소통이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는 것이 또 다른 해결책일 수 있을 것이다. 

팻걸의 아나이스 표정에선 가족을 잃은 슬픔은 찾아보기 힘들다. 날씬하고 매력적인 외모의 엄마나 언니는 같은 여자로서 라이벌 의식을 갖게 하는 존재들이다. 가족이 참혹하게 죽었지만 아나이스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정체성이다. 아나이스는 한 번도 남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지만 늘 연애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소녀다. 자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해줄 남자를 찾고 있으며 육체적인 흔적에 동요되지 않을 거라고 늘 다짐한다. 그녀가 지닌 사랑에 대한 환상은 당연히 깨질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순간은 이상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앞뒤의 연관관계 없이 느닷없이 한 밤중에 나타난 정신이상자의 소행으로 모든 것은 산산조각이 난다.

미스트리스나 팻걸이나 사랑이란 감정은 허망하게 끝난다. 두 영화에 존재하는 건 육체적인 사랑뿐이다.

미스트리스에서 마리니와 벨리니에게 섹스는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경지이다. 평범한 삶 속에서 일반적인 행복감을 느끼던 그들에게 딸의 갑작스런 죽음은 둘의 범상치 않았던 출발점으로 원상복귀시킨다. 딸의 시신을 불태우면서 그 앞에서 정사를 나누는 두 사람, 그리고 딸의 죽음에 대한 고통으로 짐승처럼 울부짖는 벨리니.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죽고 싶을만큼 암담한 순간에 두 사람은 고통스런 섹스를 나눈다. 그 뒤로도 그들이 나누게 되는 정사는 고통스럽기만 하다. 고통에 찬 사람이 숨을 헐떡이듯, 서로의 몸을 느끼는 것만이 유일하게 생명에 대한 증거인양 그들은 그렇게 침대 위에서 고통을 나눈다. 아이의 죽음, 그리고 이별, 그 후에 마리니의 재혼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부정하고 서로의 존재를 무시한다. 하지만 육체적인 교감은 계속 된다.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건 육체 언어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건조하기 그지 없는 정사 장면은 관객에게 흥분은 커녕 고통만을 느끼게 만든다. 

두 영화에서 현실이란 뜬 구름처럼 불안하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쓴디쓴 현실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살아간다. 팻걸의 아나이스는 자신이 만든 가상의 연인과 대화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미스트리스에서 운명처럼 닮은 두 연인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결코 헤어지지 못 한다. 둘의 만남은 결코 달콤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서로의 상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못 하는 상처를.

팻걸에서 불안정한 현실이 이유 없이 한 순간에 파괴돼버렸다면 미스트리스에선 누더기가 되긴 했지만 그나마 현실 속에 발을 붙이고 살아간다.

까뜨린느 브레야는 영화 속에서 어떤 결론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모든 감정들... 사랑, 매혹, 질투, 포기, 현실과의 갈등, 그리고 타협 등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어느 선을 따라가느냐는 보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는다.

덧글

  • 식물 2012/08/22 13:37 # 삭제 답글

    팻걸에서 아나이스가 강간당하지 않았다고 하는건 순결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강간이 바로 자기가 원했던 형태의 '첫 경험'이었기 때문이겠죠. 사랑하는 사람과 첫 경험을 하기 싫다고 누누히 말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울면서 고민하면서 억지로 첫 경험을 하는 게 진정한 섹스인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강간일지언정 처음부터 자기가 원했던 형태의 첫 경험을 하고 만족하는 게 진정한 섹스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장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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