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에 보는 가을 같은 영화.
근원을 찾아 떠났지만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다. 물론 그 과정에 약간의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가슴 한 구석을 서늘하게 만드는 자기 동일시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의 한계인 것 같다. 영화는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강하게 탐구하려 들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결론은 결국 지금 이대로의 삶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며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 앞에선 현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극과 극인 두 자매의 일상을 엿보게 만든다. 세련된 도시 직장여성 이미지의 명은과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명주의 삶에는 교차점이라곤 없어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동시에 받는 한 통의 전화는 둘의 삶을 하나의 점으로 모은다. 그것은 엄마의 죽음이다. 사실 둘 사이의 공통점이라곤 엄마가 같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명은은 정체성의 반이 모호한 채로 20년이 넘게 살아왔고 이제 그 불투성한 반쪽 부분을 밝히려고 떠난다.
명주는 있는 그대로의 삶 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낳게 된 사생아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에만 가치를 둘 뿐,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됐는지 과거를 캐고 들어가길 원치 않으며,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신선도가 떨어지기 전에 생선을 다 팔아치워야 하듯이 그렇게 쫓기듯 하루를 마무리하며 살아가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명주는 흠 투성이인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듬어 안고 산다. 그래서 엄마가 동생이라고 부르던 연하의 남자와 관계를 맺고 동생을 낳게 된 것도 그리고 그 남자가 이모로 변신한 것도 그녀에게 받아들이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 만난 사람들과 쉽게 술잔을 부딪힐만큼 오지랖이 넓다.
명은은 그런 명주가 싫다. 너댓살 차이가 나지만 절대로 언니라고 부르는 법이 없다. 명은에게 명주는 너무나 한심하기 그지 없는 여자일 뿐이다. 명은에겐 명주와 한쪽 피가 같다는 것은 수치다. 그래서 명은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존재인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명주와는 다른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인생들로 둘러싸인 자신의 삶 속에서 탈출구를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아버지란 정체성의 확인, 그리고 아버지에게 품고 있었던 섭섭한 감정에 대한 숙제를 그녀는 이제 풀고 싶었던 것이다.
관객을 이끌고 갔던 명은의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은 너무나 허무하게 풀리고 만다. 그것도 석연치 않는 방법으로.
명은의 마지막 표정으로 봤을 때 그녀는 더욱 더 모호해진 자신의 삶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듯하다. 그것도 큰 갈등 없이. 명은과 명주는 다르면서도 닮은 자매였던 것이다.
귀가하는 자매를 맞이하기 위해 죽은 엄마가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이모의 모습은 명은이 찾아헤매던 아빠가 엄마와 합쳐지는 순간이 된다. 명은에게 그것은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을 뜻한다. 이젠 더 이상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것이다. 편지에서 약속한 꼭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지만 아빠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아빠만의 방식으로 지킨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기대가 배신 당하는 순간이다. 좋아하지 않는 이모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 영화는 명은의 선택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엄청난 비밀이 공개되는 순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위장된 평온함이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이지만 그 안에 엄청난 위장과 폭로를 담고 있다. 하지만 생긴대로 산다는 명주 식 삶의 철학으로 봤을 때 받아들이지 못 할 일은 이 세상에 없다. 받아들이지 못할 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어찌 보면 영화 연출의 힘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다시 일상 속으로 귀환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피날레로 처리할만한 힘을 이 영화는 과연 가지고 있는가. 아닌 것 같다. 어느 순간 갑자기 엄청난 틈을 두 주인공이 손을 잡고 점프해서 건너넘어버린 듯한 느낌. 그 가운데에 석연치 않음과 공허함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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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2009/05/03 12:21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박혜연 2009/06/17 23:44 # 삭제 답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가족관계를 보자면 30세가 된 생선장수인 명주 그리고 19세에 얻은 딸 승아, 그리고 20세가 된 커리어우먼인 씨다른 여동생인 명은 그리고 현아이모(사실은 명은의 친부) 이렇게 네식구가 산다! 암튼 웃기는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