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철조망 안인가, 밖인가. 영화, 드라마 이야기




 자신의 입장을 호소할 때 흔히 쓰는 말이 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라.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렇다.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것이 자신이 가장 혐오했던 것으로 바뀌어있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그건 비참하다는 표현만으로도 부족한 몸서리쳐지는 배신감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배신감, 신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운명에 대한 배신감.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 소년을 뜻한다. 줄무늬 파자마는 장난으로라도 절대로 입어서는 안 될 옷이다. 그것은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맨 마지막으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정말 아이러니칼 하게도 유태인 수용소를 책임지고 있는 독일 나치 장교의 아들, '부르노'다.

 부르노가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려고 줄무늬 옷을 갈아입었을 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불길하고 명확한 예감 때문에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부르노와 유태인의 아이 중, 우리는 누구의 편이었을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깨끗하고 아름답고 안전한 세계 속에서 왕자님처럼 살아가는 부르노였을 것이다. 그런데 철조망을 넘는 순간 우리는 유태인 아이의 처지가 돼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서늘해졌을 것이다.

 부르노는 유태인 아이와 친구가 되자던 약속을 그런 식으로 지켰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천장을 쳐다보는 아이의 티끌 없는 눈동자를 보는 세상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가져야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수치심? 죄책감? 아니면 책임의 전가? 아니면 두려움?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에서 끔찍한 전쟁의 현장을 담은 사진을 보고 느끼는 가벼운 연민으로 현실을 외면하려고 하는 나약하고 무감각한 인간들을 비판하고 있다. 믿고 싶지 않을만큼 끔찍한 형상을 본 사람들은 애써서 영화의 한 장면과 동일시하려 한다. 그것은 인간들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이중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자신이 믿고 싶은 세계와 실재 세계, 엄밀히 말하자면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데도 인간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이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두 개의 세계를 인정함으로써 발생하는 갈등과 가치관의 혼란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철조망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세계의 한계선을 뜻한다. 한계선을 넘어가는 행위엔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한계선 너머의 세계를 부인함으로써 자신의 안전한 세계는 지켜질 거라 믿는다. 그러니 이미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 선을 넘는 일은 할 수 없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결과를 철저하게 계산할 줄 알기 때문이다.
 부르노는 하나뿐인 자신의 세계를 믿은 탓에 죽음을 맞이했다.    

 엔딩씬에서 끔찍한 사태를 감지하고 부르노를 목터지게 부르던 나치 장교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 신에 대한 원망? 아니면 자신에 대한 환멸? 현실에 대한 부정? 아니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인식?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유태인들의 죽음이 같은 인간의 끔찍한 죽음이었다는 걸 아들로 인한 대리체험을 통해 인식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왔고, 그게 바로 인간이 만들어온 역사인 것이다. 자신이라면 절대로 꿈에서라도 당하고 싶지 않는 일은 타인에게 저지르는 인간이란 종족이 저지른 만행은 너무나도 많다. 우리는 그렇게 위험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상징물인 철조망이 현실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의식 속에, 그리고 무의식 속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설사 꿈 속에서라도 그 철조망을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현실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의가 아니라도 언젠가 그 철조망을 넘어가게 돼 있다고 생각해보라.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 역시 단두대 위에서 희생됐다. 철조망의 위치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바로 내 앞에서, 또는 내 뒤에 쳐질 수 있다. 천장에 뚫려 있는 가스주입구를 바라보는 브루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이었다. 어떤 것도 인간들의 싸움을 막는 데 성공하지 못 했다. 인간들간의 피비린내나는 희생을 막아야 할 종교는 오히려 전쟁의 원천이 돼왔다. 타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없다면 종교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종교란 자신의 안위와 번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자신도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전쟁을 벌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당 방위처럼 위장된 채 오늘도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같이 느끼고 숨쉬고 생각하던 인간들의 주검을 앞에 둔 채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같은 종족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아끼는 사람이 죽었을 때 복받치는 슬픔을 누르고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주검을 자신의 곁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죽은 뒤의 육신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은 죽은 이의 시신 처리까지 꼭 마쳐야 할 도리를 다 마쳤다고 생각한다. 죽은 후의 인간의 육체란 사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기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예의다. 인간은 결코 동물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평화를 가장한 위선적인 우리 현실을 고발하는 사람들, 그것은 바로 철조망을 넘는 사람들이다. 미국인인 수잔 손택은 미국에 대해 "백인은 역사의 암이다" "미국은 대량 학살 위에 세워졌다" "미국적 삶의 특성은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향한 모독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미국의 보수 세력이 그녀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런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의 무감각을 누가 깨워줄 것인가. 나는 80년대 한국 사회에 충격을 던지면서 세계 청년 학생 축전에 참가했던 20대 초반의 임수경의 천진한 얼굴이 생각난다. 그 순간 만큼은 그녀도 순수했을 거라고 믿는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쳐져 있었던 남북한 사이의 철조망은 아직도 존재하며 언제 걷힐 것인지 기약이 없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식을 듣는 오늘 아침에도 내가 떠올린 단어는 두려움이나 당혹감보다는 이해할 수 없음이었다. 
  
 <신경증자 재스민의 영화로 버티기>의 일부


덧글

  • 아이 2009/07/04 22:34 # 답글

    보고싶어지는 영화네요, 마음이 많이 아플 것 같지만요..
  • 2013/11/08 02:51 # 삭제 답글

    와...정말 글 잘쓰시네요.. 감탄하고갑니다.
  • 2017/01/14 22:59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감탄 2017/04/20 02:15 # 삭제 답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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