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니게임 - 닫힌 공간과 공포, 그리고 반복 영화, 드라마 이야기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식을 주제로 삼았든지 시대성이 무시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에 만들어진 민비와 21세기에 만들어진 명성왕후의 차이가 제목의 차이만이진 않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반영하느냐이다. 있는 그대로 실재에 가깝게 사실감을 살릴 것인가. 판타지를 부여할 것인가. 사실 모든 영화에는 환타지가 있다. 현실감을 그대로 살리려고 했더라도 스크린 위에 비쳐진 이미지가 현실의 그것과 느낌이 같을 수 없다. 이미지는 때로 확대되고, 때로는 배경 속으로 흡수되듯 축소되고 과장된 소리는 세세한 바람소리까지 세밀하게 잡아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오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열린다. 미카엘 하네케는 퍼니게임이란 이름의 똑같은 영화를 두 번씩이나 만들었다. 10년이라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새로운 낯설음과 섬칫함으로 다가온다. 신기한 일이다. 눈돌아갈만큼 빨리 변해하는 세상에서 10년이란 많은 변화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유없이 당하는 테러에 대한 느낌은 낡기는 커녕 지금의 시대에 딱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리지날 퍼니게임은 97년에 만들어졌다.  독일배우들을 기용해 독일어로 만들어졌던 작품은 2008년도에 헐리우드 배우들로 다시 만들어진다. 리메이크라고 하기엔 화면 구성이나 플롯이 너무 똑같아서 배우들만 바뀐 복사판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일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해서 두 번씩 똑같은 영화를 만들어야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나오미 왓츠나 마이클 피트 같은 낯익은 배우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 느낌은 독일 배우들이 나오는 퍼니게임과는 살짝 다르다. 

 인간을 상대로한 퍼니게임은 전혀 퍼니하지 않다. 기가 막혀서 웃길 뿐이다. 경비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해변가의 별장에서 일어지는 살인사건들. 도미노가 넘어지듯 가족들은 차례로 살해당한다. 휴양지를 찾아오는 각 가족들은 마치 차례를 기다리듯 범인들이 쳐놓은 덫에 하나씩 걸려드는 셈이다. 그들이 원했던 일상생활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꿈은 말 그대로 악몽이 된다.  문명과 질서로부터 일탈을 꿈꾸던 사람들은 어쩌다 잘못 미끄러지는 바람에 블랙홀 같은 실재의 세상으로 빨려들어간다.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곳이며 인과율이 무시되는 곳이다. 아무 이유없이 누군가가 뒤통수를 갈겨 그대로 쓰러지는 꼴이다. 자신의 권리에 대한 주장 따위는 여기선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무기력한 피해자가 되는 것은 힘없는 어린아이나 동물들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성장한 인간들 역시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느 순간까지 자신의 세계를 주장한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우리를 겁주려는 것인가, 돈이 필요한 거라면 얼마든지 갖고 떠나게" "아직 젊고 앞날이 창창하잖아요. 지금까진 아무일도 없었으니 그냥 가면 돼요"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판단을 포기하는 순간에 죽음에 대한 기대는 오히려 달콤한 것이 될 것이다.   
 
 신문에서 동물을 상대로한 십대의 퍼니게임을 읽는 순간 이 영화가 다시 생각났다. 장난으로 고양이를 죽이는 행위, 새를 고문하다가 죽이는 행위, 동물들이 느끼는 고통이 인간의 그것만큼 민감하고 강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들이 느꼈던 고통과 공포가 어떤 것이었을까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실재와 상상, 그 사이의 간극이 얼마만한 것인지 절대로 알 수 없다.  
 
 죽음은 순간이고 그 다음부터는 무존재와 평화의 세계이다. 현실이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순간 우리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무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시시각각 어떤 식으로든 그곳에 가까워지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든, 도보로 가든 그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늘 두려워해야만 할 일이지만 그 두려움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게임에서 인간들은 하찮은 생물의 목숨이 된다. 그리고 인간의 고통은 동물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때로는 살아남는 것이 더 불행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길 포기하는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이길 포기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비인간적인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경험, 그리고 우리도 범인과 똑같은 공범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 중간 중간에, 그리고 마지막 씬에서 마이클 피트는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꽂는다. 지긋지긋한 반복에 대한 예감, 그리고 그 눈빛 안에 우리가 있다.


국가대표 - 알면서도 기대하는 원초적인 감동과 흥분 영화, 드라마 이야기


 스포츠 영화의 성공적인 첫 깃발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꽂았다. 그 후로 '킹콩을 들다'가 선전했고, '국가대표'가 성공을 거둔다. 스포츠 영화의 주제는 똑같다. 그래서 영화관에 가서 그 영화를 봐야 하는가 잠시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결국 난 국가대표를 보고 말았다. 감동은 뭐 뻔한 일일테니 내 관심사는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느냐에서 오는 잔재미에 있었다.

 난 시대에 영합한 영화에 반골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내게 7,80년대에 호스테스 영화가 성공을 거두면서 아류작이 쏟아져나오는 상황이 떠오르는 것은 아귀가 맞는 현상일까. 오버일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의 정치 상황과의 연결짓지 않을 수 없다. 답답하고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기를 현재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르겠으나 인간에겐 체감도라는 상대적인 기준이 있다. 군사정권시기에 어수룩한 학생이었던 나는 실제론 그 살벌함과 답답함을 체감하지 못 했다. 개인사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전체적인 조감도를 볼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상대적인 비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웬만큼 클 때까지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단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대통령이 개그의 대상이 되고 대통령의 말투가 개그 소재가 되어 배꼽을 잡게 만드는 일을 경험하고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경험하고 난 뒤에 느끼는 체감도는 당연히 예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2009년 현재, 스포츠 영화들의 성공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런 현실적 상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영화들은 모두 비인기 종목을 다루고 있다. 소외받은 자들의 성공이란 애초부터 감동의 씨를 품고 있다. 천덕꾸러기로 무시당한 자들이 보란 듯이 성공을 거두면서 기득권 세력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는 상황이란 언제 다시 재현돼도 통쾌하다. 앞뒤가 꽉 막힌 현실 상황에 탈출구가 뚫리는 듯한 기시감으로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있는 일말의 열등감까지도 순간적이나마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위의 세 영화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특성이다. 이런 선상에서 볼 때 국가대표는 세 영화 중 기본적인 역할에 가장 충실한 영화다. 스키 점프라는 스포츠가 지니고 있는 속도감과 박진감, 하늘을 나는 느낌 등 스포츠, 핸드볼이나 역도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국가대표의 성공은 상당 부분을 스키 점프란 스포츠에 기대고 있다. 스키 점프의 본질적인 요소 자체가 밑바닥에서 위로 솟구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공중에서 머문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속도를 극복하고 공중에 떠 오르는 순간의 희열과 흥분 역시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큼 위험한 것이다. 그 다음에 지상에 어떻게 안착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나기 때문에 다음의 일을 보장받을 수 없는 불안하기 그지 없는 환희의 상태다. 롤러 코스트를 타듯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을 카메라의 움직임과 사운드를 통해 공감하는 우리는 함께 손에 땀을 쥔다. 

 엄마를 찾아온 입양아라는 설정과 코치의 막가파 수준 딸과 선수 사이에 이뤄지는 어설픈 러브라인, 그리고 불우한 환경의 형제 같은 동정심을 자극하는 요소들은 사실 킹콩을 들다에 나오는 불우한 환경의 어린 소녀나 코치의 죽음만큼 강하지 않고, 감칠 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로 사실적이면서 은근하게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킹콩을 들다와는 달리 행동으로 웃음을 유발하려는 코믹성은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깝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여운이 남아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유는 뭘까. 미끄러져 내려오는 선수의 속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몸에 전율이 일게 만들었던 것은 물리적인 움직임과 심리적 동선이 그대로 일치된 데서 나오는 효과가 아닐까. 언제까지나 공중에서 머물을 순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공중에 있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한 일일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순간이 그렇게나 흥분되고 가치를 주는 것은 그 다음에 땅으로 떨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선수들과 함께 공중에 떠올랐다가 땅 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스포츠 영화엔 결론이 없다. 도전은 계속 될 것이라는 공허한 시사만이 있을 뿐이다. 끝도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않는 어설픈 결말을 보는 현실은 그래서 결국 씁슬하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철조망 안인가, 밖인가. 영화, 드라마 이야기




 자신의 입장을 호소할 때 흔히 쓰는 말이 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라.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렇다.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것이 자신이 가장 혐오했던 것으로 바뀌어있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그건 비참하다는 표현만으로도 부족한 몸서리쳐지는 배신감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배신감, 신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운명에 대한 배신감.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 소년을 뜻한다. 줄무늬 파자마는 장난으로라도 절대로 입어서는 안 될 옷이다. 그것은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맨 마지막으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정말 아이러니칼 하게도 유태인 수용소를 책임지고 있는 독일 나치 장교의 아들, '부르노'다.

 부르노가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려고 줄무늬 옷을 갈아입었을 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불길하고 명확한 예감 때문에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부르노와 유태인의 아이 중, 우리는 누구의 편이었을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깨끗하고 아름답고 안전한 세계 속에서 왕자님처럼 살아가는 부르노였을 것이다. 그런데 철조망을 넘는 순간 우리는 유태인 아이의 처지가 돼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서늘해졌을 것이다.

 부르노는 유태인 아이와 친구가 되자던 약속을 그런 식으로 지켰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천장을 쳐다보는 아이의 티끌 없는 눈동자를 보는 세상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가져야 스스로를 정당화될 수 있을까. 수치심? 죄책감? 아니면 책임의 전가? 아니면 두려움?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에서 끔찍한 전쟁의 현장을 담은 사진을 보고 느끼는 가벼운 연민으로 현실을 외면하려고 하는 나약하고 무감각한 인간들을 비판하고 있다. 믿고 싶지 않을만큼 끔찍한 형상을 본 사람들은 애써서 영화의 한 장면과 동일시하려 한다. 그것은 인간들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이중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자신이 믿고 싶은 세계와 실재 세계, 엄밀히 말하자면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데도 인간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이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두 개의 세계를 인정함으로써 발생하는 갈등과 가치관의 혼란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철조망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세계의 한계선을 뜻한다. 한계선을 넘어가는 행위엔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한계선 너머의 세계를 부인함으로써 자신의 안전한 세계는 지켜질 거라 믿는다. 그러니 이미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 선을 넘는 일은 할 수 없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결과를 철저하게 계산할 줄 알기 때문이다.
 부르노는 하나뿐인 자신의 세계를 믿은 탓에 죽음을 맞이했다.    

 엔딩씬에서 끔찍한 사태를 감지하고 부르노를 목터지게 부르던 나치 장교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 신에 대한 원망? 아니면 자신에 대한 환멸? 현실에 대한 부정? 아니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인식?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유태인들의 죽음이 같은 인간의 끔찍한 죽음이었다는 걸 아들로 인한 대리체험을 통해 인식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왔고, 그게 바로 인간이 만들어온 역사인 것이다. 자신이라면 절대로 꿈에서라도 당하고 싶지 않는 일은 타인에게 저지르는 인간이란 종족이 저지른 만행은 너무나도 많다. 우리는 그렇게 위험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상징물인 철조망이 현실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의식 속에, 그리고 무의식 속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설사 꿈 속에서라도 그 철조망을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현실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의가 아니라도 언젠가 그 철조망을 넘어가게 돼 있다고 생각해보라.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 역시 단두대 위에서 희생됐다. 철조망의 위치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바로 내 앞에서, 또는 내 뒤에 쳐질 수 있다. 천장에 뚫려 있는 가스주입구를 바라보는 브루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이었다. 어떤 것도 인간들의 싸움을 막는 데 성공하지 못 했다. 인간들간의 피비린내나는 희생을 막아야 할 종교는 오히려 전쟁의 원천이 돼왔다. 타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없다면 종교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종교란 자신의 안위와 번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자신도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전쟁을 벌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당 방위처럼 위장된 채 오늘도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같이 느끼고 숨쉬고 생각하던 인간들의 주검을 앞에 둔 채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같은 종족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아끼는 사람이 죽었을 때 복받치는 슬픔을 누르고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주검을 자신의 곁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죽은 뒤의 육신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은 죽은 이의 시신 처리까지 꼭 마쳐야 할 도리를 다 마쳤다고 생각한다. 죽은 후의 인간의 육체란 사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기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예의다. 인간은 결코 동물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평화를 가장한 위선적인 우리 현실을 고발하는 사람들, 그것은 바로 철조망을 넘는 사람들이다. 미국인인 수잔 손택은 미국에 대해 "백인은 역사의 암이다" "미국은 대량 학살 위에 세워졌다" "미국적 삶의 특성은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향한 모독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미국의 보수세력이 그녀를 좋아할지 만무하다. 그런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의 무감각을 누가 깨워줄 것인가. 나는 80년대한국 사회에 충격을 던지면서 세계 청년학생 축전에 참가했던 20대 초반의 임수경의 천진한 얼굴이 생각난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도 순수했을 거라고 믿는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쳐져 있었던 남북한 사이의 철조망은 아직도 존재하며 언제 걷힐 것인지 기약이 없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식을 듣는 오늘 아침에도 내가 떠올린 단어는 두려움이나 당혹감보다는 이해할 수 없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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