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 현재와 과거의 접점 영화, 드라마 이야기


 밖은 갑작스럽게 몰려온 한파로 말없이 소란스럽고 영화는 침묵에 의존한다.

 이 영화는 진희라는 한 아이에 의한 한 아이의 영화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아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아이는 이 영화 세계의 중심이자 시작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인 이 아이의 캐릭터에 집중한다. 여러명이 함께 한 프레임 안에 잡힐 때도 그 중심에는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을 한 진희가 있으며 다른 아이들을 잡을 때에도, 바깥 풍경을 잡을 때에도 진희의 시선이 우리의 의식 한 가운데 있다. 심지어 진희가 고아원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 땅을 파고 자신의 몸을 땅에 묻을 때조차도 진희가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진희라는 하나의 순간이 현실이라는 큰 배경과 타협하는 과정 속에 다른 인물들이 서브플롯으로 진희라는 주플롯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진희는 카메라의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반항하다가 결국엔 현실을 인정하는 과정 속에는 어른들의 안쓰럽지만 어쩔 수 없는 포기의 시선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동정심 어린 어들들의 시선에 의존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진희의 얼굴은 이 모든 현상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스펙터클이다. 애초에 진희에게 불행의 씨앗을 심어줬던 아버지의 심정이나 입장은 여기서 별로 조명되지 않는다. 고아원에 모여 살게된 다른 아이들처럼 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야했는지 이유는 석연치 않다. 즉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미래과의 점접, 그리고 과정이다. 이유없이 현실 한 복판에 내던져진 상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미래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깨닫는 것, 받아들이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에게 열려진 문을 거부할 수 없다. 자신이 지닌 껍데기를 부숴버려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 거기에 살갗을 벗겨내는 통렬한 쓰라림이 따라오지만 탈을 벗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마주 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 또 다른 진희의 모습이 그 위에 자라날 것이고 그것이 자신을 몸을 뒤덮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전의 진희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던 시간이 없어지고 새로운 시간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늘 그 위에 싸이면서 동시에 중첩된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시간이란 과거이면서 동시에 현재인 것이다. 미래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가정일 뿐이다. 현재라는 이름을 갖게될 무형의 가정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커서 어른들이 되는 것은 어른으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 위에 어른이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 때 간직했던 상처는 그대로 남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진희의 내면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안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면초가의 상태, 즉 아버지는 자신을 버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자신의 위치를 보여주는 아이들과의 동거, 그나마 정을 붙인 친구, 언니와 이별 가운데서도 아이의 눈동자 속에 절망과 포기보다는 투명한 기대감이 담겨 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란 그런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다가 결국 받아들이는 과정은 어른들과 다르지 않지만 그것은 어른들은 흉내낼 수 없는 힘이다. 

 우니 르콩드는 감독이 한국출신 입양아인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테마로 한 이 영화엔 제작자인 이창동의 느낌이 살아 있다. 이창동의 다른 영화들처럼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일관적인 논리를 구사하면서 관객에게 혼란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처음과 끝이 같은 수미쌍관식의 느낌이 이 영화에도 살아 있다. 진희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시작된 영화는 진희 얼굴에서 끝이 난다.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형체를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어떤 것이 더 두려움으로 작용할까. 카메라를 돌아보는 진희의 얼굴은 관객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감독 자신이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같기도 하다.
 

퍼니게임 - 닫힌 공간과 공포, 그리고 반복 영화, 드라마 이야기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식을 주제로 삼았든지 시대성이 무시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에 만들어진 민비와 21세기에 만들어진 명성왕후의 차이가 제목의 차이만이진 않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반영하느냐이다. 있는 그대로 실재에 가깝게 사실감을 살릴 것인가. 판타지를 부여할 것인가. 사실 모든 영화에는 환타지가 있다. 현실감을 그대로 살리려고 했더라도 스크린 위에 비쳐진 이미지가 현실의 그것과 느낌이 같을 수 없다. 이미지는 때로 확대되고, 때로는 배경 속으로 흡수되듯 축소되고 과장된 소리는 세세한 바람소리까지 세밀하게 잡아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오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열린다. 미카엘 하네케는 퍼니게임이란 이름의 똑같은 영화를 두 번씩이나 만들었다. 10년이라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새로운 낯설음과 섬칫함으로 다가온다. 신기한 일이다. 눈돌아갈만큼 빨리 변해하는 세상에서 10년이란 많은 변화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유없이 당하는 테러에 대한 느낌은 낡기는 커녕 지금의 시대에 딱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리지날 퍼니게임은 97년에 만들어졌다.  독일배우들을 기용해 독일어로 만들어졌던 작품은 2008년도에 헐리우드 배우들로 다시 만들어진다. 리메이크라고 하기엔 화면 구성이나 플롯이 너무 똑같아서 배우들만 바뀐 복사판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일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해서 두 번씩 똑같은 영화를 만들어야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나오미 왓츠나 마이클 피트 같은 낯익은 배우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 느낌은 독일 배우들이 나오는 퍼니게임과는 살짝 다르다. 

 인간을 상대로한 퍼니게임은 전혀 퍼니하지 않다. 기가 막혀서 웃길 뿐이다. 경비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해변가의 별장에서 일어지는 살인사건들. 도미노가 넘어지듯 가족들은 차례로 살해당한다. 휴양지를 찾아오는 각 가족들은 마치 차례를 기다리듯 범인들이 쳐놓은 덫에 하나씩 걸려드는 셈이다. 그들이 원했던 일상생활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꿈은 말 그대로 악몽이 된다.  문명과 질서로부터 일탈을 꿈꾸던 사람들은 어쩌다 잘못 미끄러지는 바람에 블랙홀 같은 실재의 세상으로 빨려들어간다.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곳이며 인과율이 무시되는 곳이다. 아무 이유없이 누군가가 뒤통수를 갈겨 그대로 쓰러지는 꼴이다. 자신의 권리에 대한 주장 따위는 여기선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무기력한 피해자가 되는 것은 힘없는 어린아이나 동물들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성장한 인간들 역시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느 순간까지 자신의 세계를 주장한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우리를 겁주려는 것인가, 돈이 필요한 거라면 얼마든지 갖고 떠나게" "아직 젊고 앞날이 창창하잖아요. 지금까진 아무일도 없었으니 그냥 가면 돼요"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판단을 포기하는 순간에 죽음에 대한 기대는 오히려 달콤한 것이 될 것이다.   
 
 신문에서 동물을 상대로한 십대의 퍼니게임을 읽는 순간 이 영화가 다시 생각났다. 장난으로 고양이를 죽이는 행위, 새를 고문하다가 죽이는 행위, 동물들이 느끼는 고통이 인간의 그것만큼 민감하고 강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들이 느꼈던 고통과 공포가 어떤 것이었을까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실재와 상상, 그 사이의 간극이 얼마만한 것인지 절대로 알 수 없다.  
 
 죽음은 순간이고 그 다음부터는 무존재와 평화의 세계이다. 현실이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순간 우리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무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시시각각 어떤 식으로든 그곳에 가까워지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든, 도보로 가든 그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늘 두려워해야만 할 일이지만 그 두려움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게임에서 인간들은 하찮은 생물의 목숨이 된다. 그리고 인간의 고통은 동물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때로는 살아남는 것이 더 불행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길 포기하는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이길 포기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비인간적인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경험, 그리고 우리도 범인과 똑같은 공범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 중간 중간에, 그리고 마지막 씬에서 마이클 피트는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꽂는다. 지긋지긋한 반복에 대한 예감, 그리고 그 눈빛 안에 우리가 있다.


국가대표 - 알면서도 기대하는 원초적인 감동과 흥분 영화, 드라마 이야기


 스포츠 영화의 성공적인 첫 깃발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꽂았다. 그 후로 '킹콩을 들다'가 선전했고, '국가대표'가 성공을 거둔다. 스포츠 영화의 주제는 똑같다. 그래서 영화관에 가서 그 영화를 봐야 하는가 잠시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결국 난 국가대표를 보고 말았다. 감동은 뭐 뻔한 일일테니 내 관심사는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느냐에서 오는 잔재미에 있었다.

 난 시대에 영합한 영화에 반골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내게 7,80년대에 호스테스 영화가 성공을 거두면서 아류작이 쏟아져나오는 상황이 떠오르는 것은 아귀가 맞는 현상일까. 오버일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의 정치 상황과의 연결짓지 않을 수 없다. 답답하고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기를 현재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르겠으나 인간에겐 체감도라는 상대적인 기준이 있다. 군사정권시기에 어수룩한 학생이었던 나는 실제론 그 살벌함과 답답함을 체감하지 못 했다. 개인사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전체적인 조감도를 볼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상대적인 비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웬만큼 클 때까지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단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대통령이 개그의 대상이 되고 대통령의 말투가 개그 소재가 되어 배꼽을 잡게 만드는 일을 경험하고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경험하고 난 뒤에 느끼는 체감도는 당연히 예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2009년 현재, 스포츠 영화들의 성공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런 현실적 상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영화들은 모두 비인기 종목을 다루고 있다. 소외받은 자들의 성공이란 애초부터 감동의 씨를 품고 있다. 천덕꾸러기로 무시당한 자들이 보란 듯이 성공을 거두면서 기득권 세력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는 상황이란 언제 다시 재현돼도 통쾌하다. 앞뒤가 꽉 막힌 현실 상황에 탈출구가 뚫리는 듯한 기시감으로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있는 일말의 열등감까지도 순간적이나마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위의 세 영화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특성이다. 이런 선상에서 볼 때 국가대표는 세 영화 중 기본적인 역할에 가장 충실한 영화다. 스키 점프라는 스포츠가 지니고 있는 속도감과 박진감, 하늘을 나는 느낌 등 스포츠, 핸드볼이나 역도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국가대표의 성공은 상당 부분을 스키 점프란 스포츠에 기대고 있다. 스키 점프의 본질적인 요소 자체가 밑바닥에서 위로 솟구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공중에서 머문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속도를 극복하고 공중에 떠 오르는 순간의 희열과 흥분 역시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큼 위험한 것이다. 그 다음에 지상에 어떻게 안착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나기 때문에 다음의 일을 보장받을 수 없는 불안하기 그지 없는 환희의 상태다. 롤러 코스트를 타듯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을 카메라의 움직임과 사운드를 통해 공감하는 우리는 함께 손에 땀을 쥔다. 

 엄마를 찾아온 입양아라는 설정과 코치의 막가파 수준 딸과 선수 사이에 이뤄지는 어설픈 러브라인, 그리고 불우한 환경의 형제 같은 동정심을 자극하는 요소들은 사실 킹콩을 들다에 나오는 불우한 환경의 어린 소녀나 코치의 죽음만큼 강하지 않고, 감칠 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로 사실적이면서 은근하게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킹콩을 들다와는 달리 행동으로 웃음을 유발하려는 코믹성은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깝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여운이 남아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유는 뭘까. 미끄러져 내려오는 선수의 속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몸에 전율이 일게 만들었던 것은 물리적인 움직임과 심리적 동선이 그대로 일치된 데서 나오는 효과가 아닐까. 언제까지나 공중에서 머물을 순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공중에 있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한 일일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순간이 그렇게나 흥분되고 가치를 주는 것은 그 다음에 땅으로 떨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선수들과 함께 공중에 떠올랐다가 땅 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스포츠 영화엔 결론이 없다. 도전은 계속 될 것이라는 공허한 시사만이 있을 뿐이다. 끝도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않는 어설픈 결말을 보는 현실은 그래서 결국 씁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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